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범/선수 경력 (문단 편집) ===== 홈구장 적응 문제 ===== 하필 [[주니치 드래곤즈]]의 홈구장인 [[나고야 돔]]이 [[잠실 야구장]] 못지 않게 외야가 넓고 펜스가 [[사직 야구장]]만큼 높기로 유명한,[* 좌우 100m, 센터 122m, 펜스 높이 4.8m] 일본 프로야구 구장에서도 매우 투수친화적인 구장이었던 것도 몰아치는 타격에 능했던 이종범의 부진이 깊어지는데 한 몫을 했다. 실제로 한국이나 일본의 다른 타자 친화적인 구장이었다면 넘어가거나 펜스를 때렸을 타구들이 여지없이 외야수의 글러브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종종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한번 불이 붙으면 기세를 타서 플레이하던 이종범에겐 호시노의 갈굼과 함께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야구장과 비슷했던 야쿠르트의 메이지 진구구장이나 요코하마의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활약이 좋았다. 당시 [[나고야 돔]]의 악명은 대단했는데, 90년대 초중반까지 강력한 공격력으로 승부하던 [[주니치 드래곤즈]]는 입주 첫 해 타격지표가 말 그대로 폭락해버렸다. 당장 전 시즌 타율 .332 '''39홈런''' 107타점으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야마사키 타케시]]는 나고야 돔 입주 첫 해인 97시즌에 출장 경기수가 130경기로 전 시즌 127경기보다 3경기가 더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257 19홈런 54타점으로 타격 지표가 반토막이 나버렸고, 38홈런 89타점을 올린 [[타이호 야스아키]]는 12홈런 35타점으로 더욱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94년부터 3년 연속 리그 타율 1위였으며, 직전해 리그 최다안타와 함께 타율.340 14홈런을 기록했던 알론조 파웰도 타율.253 14홈런으로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홈런 수는 겨우 유지했으나, 타율이 급락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광활한 나고야돔을 과하게 의식한 배팅을 한데 이어서, 무릎부상의 영향으로 자신의 배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나고야돔의 넓은 외야를 지키기에는 수비범위에서도 문제를 드러내어 97시즌 후 퇴단하고, 이듬해 한신으로 이적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결국 은퇴한다.[[https://ja.wikipedia.org/wiki/%E3%82%A2%E3%83%AD%E3%83%B3%E3%82%BE%E3%83%BB%E3%83%91%E3%82%A6%E3%82%A8%E3%83%AB|출처]]] 이러한 팀 공격력의 급격한 저하로 인해 주니치는 그 해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굴욕을 겪었고, 이 참상을 목격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기존까지의 공격력 중심 팀컬러를 버리고 기동력, 수비력을 중심으로 하는 팀컬러로 체질 개선을 도모하면서 주니치는 빠르게 성적 저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과거 작은 [[무등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았던 해태 시절처럼 크게 당겨치는 팔로스윙을 부상 후에도 고집을 했었으니 99년과 같은 성적을 기록한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종범은 한국에서 방위복무시즌이던 95년을 제외하면 매 시즌 홈런 5위 안에 들었던 강타자였고, 일본 데뷔 첫 해에도 팀내에서 3위, 부상 직전에는 리그 10위 이내에 해당하는 제법 많은 수의 홈런을 때려냈던 만큼 당시 주니치에서 요구했던 타격방식의 변경을 쉽게 받아들이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열]]과 같이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좋은 성적으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은 역시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